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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허정신을 찾아서

능허대가 무슨 뜻이지 궁금하지?

1930년대 능허대 해변풍경

연수 이미지가 지금부터 능허대 이야기를 들려줄게

능허대는 백제가 근초고왕 27년(372년) 처음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이래 중국으로 가는 우리의 사신들이 출발했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지.

지금의 연수구 옥련동 일대야.

능허대(凌虛臺)의 명칭은 소동파의「적벽부」에 나오는“능만경(凌萬頃)”의 “능(凌)”과 “빙허어풍(憑虛御風)”의 “허(虛)”를 따서 “만경(萬頃)을 넘어(능 : 凌) 을 하늘(허 : 虛)을 오른다”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어

조선시대 이래 특히 조망이 좋은 냇가와 호수 주변의 누각이나, 절경의 해안가에 “능허대”라는 이름이 많이 붙여졌다고들 해.

이것으로 미루어 불 때 “능허대”는 나루터인 한나루가 위치한 해변 언덕에 누각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이 높아

능허대 얘기를 좀 더 해줄까?

한성에서의 요서지방, 평양, 백제와 가야사이로 진출하였고, 산둥 반도, 동진, 규슈로 교류 관계.

4세기 삼국시대 백제의 근초고왕은 마한을 통합하고~ 옛 낙랑과 대방의 영토를 손에 넣고~ 고구려와의 승부수를 띄우지

우리는 이 전쟁을 제1차 여제전쟁이라고 해

고구려와 백제 간 제1차 여제전쟁은 한강 이북과 이를 통한 경기만의 제해권 확보를 위한 전쟁이었어

백제는 서기 371년(근초고왕 26년) 고구려의 평양성을 격파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함으로써 등주항로의 안정화를 꽤할 수 있었지

이 거대한 뱃길은 한성백제 시대 정치적·군사적·경제적 교류의 핏줄로서, 이 뱃길을 통해 백제는 국력의 비약적 신장을 가질 수 있었고, 이는 결국 한성백제의 문화를 꽃피우는 결정적 계기라 할 수 있어

당시 동북아의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중국은 한족국가인 진과 5호(흉노, 갈, 선비, 저, 강)의 대결 국면이었고, 우리는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 국면으로서,“남북대립-동서교류”의 외교적 구도를 형성하게 돼

이러한 영향으로 서기 372년(근초고왕 27년) 백제는 마침내 능허대 한나루에서 최초의 중국과 통교를 위한 사신선을 출항시키지
이는 단순히 중국과의 조공책봉관계 수립이 아닌, 해상강국 백제의 국력신장을 위한 자주적·진취적 외교적 성과로 평가할 수 있고,

연수 이미지는 이를 “능허정신”이라고 불러

경제자유구역과 인천신항을 통해서 동북아를 넘어 전세계로의 비상을 꿈꾸는 우리 연수구는 단순한 신생도시가 아니라, 1600여년전부터 해외진출의 교두보로 기능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라 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과거 우리 선조의 자주적·진취적 도전정신인“능허정신”을 통해 연수구가 꾸는 꿈을 이루기 위해 “만경을 넘어 하늘로 비상”하고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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